나는 운이 좋았다. 여러 직장을 거친 순간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. 비록 당시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보니 그들이 왜 그리 행동을 했고,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이해된다는 점은 있지만. 과거에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, 그럼에도 시간이 흘러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는 시점에서 ‘내면의 성채’ (Inner Citadel : 외부 환경, 감정,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으로 평온한 마음의 상태)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한 명씩 초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‘과거’에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.
항공사 본사에서 업무를 보던 날들이 있었다. 당시 업무적으로 알고 지내던 K 사무장이 있었다. 왜소하지만 강단이 있고 카리스마 있고 따르는 후배들이 있고, 추진력 있어서 ‘팀’은 다를지언정 배울 점이 참 많은 분이었다.
당시 겉으로 보이는, 행정과 현장을 오가는 강철체력에 놀라 1차원적으로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여쭈어보곤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K 사무장은 인생에서도 업무에서도 책임감이 투철하신 분이었다. 돈을 받고 일을 하는 회사에서 책임감을 갖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, 대학 졸업 후 내가 경험한 첫 직장은 항공사이니 그러려니 너그러이 받아주시면 좋겠다.
특수 업무 특성상 철야 근무를 서는 우리 팀 외, 늦은 시간 불이 켜진 다른 팀들은 없었다. 일을 하다가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빌려 파티션 너머로 텅 빈 사무실을 훑어보는 것이, 컴퓨터를 쳐다보느라 피로에 지친 눈에게 휴식을 주는 작은 습관이었다. 그러면 K 사무장 자리에서는 사무장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.
직주근접은 하지 못 하신 분께서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고,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다. 현장에 비정상상황에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현장을 수습하는 동시에 팀원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았다.
언젠가 내가 회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그런 K 사무장 모습에서 ‘왜 저렇게 일을 하나?’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이나 한 적도 있다. 그러고선 K 사무장이 필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그에게 의지하던 나 자신이, 참으로 이기적이고 때로는 나의 태도는 나약했다.
퇴사한 직후는 ‘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거야’라는 생각도 짧지만 자주 했다. 하지만 돌고 돌아 어떤 이유든 내가 다시 직장인이 되고, 어느 순간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 보니 요즘따라 K 사무장이 참 많이 생각난다. 이해와 공감이 곁들인 떠올림이다.
왜 이제 와서, 인생에서 그리고 일에서 K 사무장의 진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걸까? 그것은 어쩌면, 당시에는 ‘나는 다를 것이다’라는 오만과 ‘나는 그 나이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’라는 부족한 현실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. 나는 아직 어리석다. 그리고 나는 아주 조금씩 K 사무장이 남긴 흔적에 ‘삶에 대한 진지함’에 대해 다시 침잠해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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